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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업지도 바꾼 ‘40년전의 창조경제’

작성자 : 최고관리자 / 날짜 : 2013.04.01

<DIV style="FONT-SIZE: 16px; line_height: 22px" class=article_txt>
<P><SPAN style="TEXT-ALIGN: left; TEXT-TRANSFORM: none; BACKGROUND-COLOR: rgb(255,255,255); TEXT-INDENT: 0px; DISPLAY: inline !important; FONT: 11px/16px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WHITE-SPACE: normal; FLOAT: none; LETTER-SPACING: -1px; COLOR: rgb(134,134,134); WORD-SPACING: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ebkit-text-size-adjust: auto">기사입력<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SPAN><SPAN style="BACKGROUND-IMAGE: url(http://img.donga.com/donga2013/images/common/bg_line.gif); TEXT-ALIGN: left; PADDING-BOTTOM: 0px; TEXT-TRANSFORM: none; BACKGROUND-COLOR: rgb(255,255,255); TEXT-INDENT: 0px; MARGIN: 0px 10px 0px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12px; DISPLAY: inline-block; FONT: 11px/16px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WHITE-SPACE: normal; BACKGROUND-POSITION: 100% 2px; LETTER-SPACING: 0px; COLOR: rgb(104,128,176); WORD-SPACING: 0px; PADDING-TOP: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ebkit-text-size-adjust: auto" class=date>2013-03-19 03:00:00</SPAN><SPAN style="TEXT-ALIGN: left; TEXT-TRANSFORM: none; BACKGROUND-COLOR: rgb(255,255,255); TEXT-INDENT: 0px; DISPLAY: inline !important; FONT: 11px/16px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WHITE-SPACE: normal; FLOAT: none; LETTER-SPACING: -1px; COLOR: rgb(134,134,134); WORD-SPACING: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ebkit-text-size-adjust: auto"><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기사수정<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SPAN><SPAN style="TEXT-ALIGN: left; PADDING-BOTTOM: 0px; TEXT-TRANSFORM: none; BACKGROUND-COLOR: rgb(255,255,255); TEXT-INDENT: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FONT: 11px/16px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WHITE-SPACE: normal; LETTER-SPACING: 0px; COLOR: rgb(106,102,102); WORD-SPACING: 0px; PADDING-TOP: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ebkit-text-size-adjust: auto" class=date2>2013-03-19 07:47:01</SPAN></P>
<P><SPAN style="TEXT-ALIGN: left; PADDING-BOTTOM: 0px; TEXT-TRANSFORM: none; BACKGROUND-COLOR: rgb(255,255,255); TEXT-INDENT: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PADDING-RIGHT: 0px; FONT: 11px/16px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 WHITE-SPACE: normal; LETTER-SPACING: 0px; COLOR: rgb(106,102,102); WORD-SPACING: 0px; PADDING-TOP: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ebkit-text-size-adjust: auto" class=date2></SPAN> </P><SPAN style="FONT-SIZE: 9pt">《 ‘발상의 전환’은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경제 발전의 중추 역할을 한 현대중공업과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모두가 “한국에서 무슨 선박을 만들 수 있겠느냐”, “한국에서 일관제철소를 만드는 건 무리”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 이들은 무모하게 도전했고 결국 성공했다. 이들이 탄생하고 성장해 온 역사는 ‘창조경제’의 길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SPAN><BR><BR><BR><BR><SPAN style="FONT-SIZE: 9pt"><B>▼ 창조경제의 씨앗 뿌린 40년전 두 장면 ▼</B></SPAN><BR>
<DIV class=articlePhotoC><SPAN style="FONT-SIZE: 9pt"><IMG src="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3/19/53799882.1.jpg" width=500 height=260></SPAN><SPAN style="WIDTH: 480px; FONT-SIZE: 9pt" class=t>현대중공업이 1973년 처음 수주한 26만 t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를 건조하는 모습. 현대중공업 제공</SPAN><SPAN style="FONT-SIZE: 9pt"> </SPAN></DIV>
<DIV class=articlePhotoC><SPAN style="FONT-SIZE: 9pt"><IMG src="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3/19/53799886.1.jpg" width=500 height=258></SPAN><SPAN style="WIDTH: 480px; FONT-SIZE: 9pt" class=t>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973년 6월 8일 오전 10시 반 포항제철소제1 고로에 불꽃을 넣고 있다. 포스코 제공</SPAN></DIV><SPAN style="FONT-SIZE: 9pt"><B><BR></B></SPAN><BR><SPAN style="FONT-SIZE: 9pt">6·25전쟁이 끝난 지 20년째 되던 1973년 한국 경제사의 큰 흐름을 바꾼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바로 현대중공업의 첫 선박 건조 돌입(3월 20일)과 포스코의 첫 쇳물 생산(6월 9일)이다. 이 두 장면을 계기로 한국 경제의 중심축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옮아갔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 조선사로서 세계를 호령하고 있고 포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회사로서 한국 산업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 울산과 포항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두 주역을 만났다.</SPAN><BR>
<DIV class=articlePhotoC><SPAN style="FONT-SIZE: 9pt"><IMG src="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3/19/53799871.1.jpg" width=500 height=322></SPAN><SPAN style="WIDTH: 480px; FONT-SIZE: 9pt" class=t>현대중공업이 조선소와 첫 선박을 함께 짓던 1973년 당시 설계 업무를 담당했던 이재실 씨(왼쪽)와 대를 이어 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수현 씨가 울산 본사의 독(dock)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SPAN></DIV><SPAN style="FONT-SIZE: 9pt"><B>▼ 조선소-수주선박 동시 건조… 발상전환이 無에서 有창조 ▼<BR><BR>■ 현대중공업 산증인 이재실 씨와 아들 수현 씨</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14일 찾은 울산 현대중공업 본사 8, 9독에서는 이 회사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재기화 설비(LNG-FRSU) 건조가 한창이었다. 해안 인근 바다에 떠 있으면서 LNG선이 운반해 온 가스를 필요할 때마다 해저 파이프를 통해 육상으로 공급하는 이 설비는 2011년 노르웨이 회에그 사에서 수주했다. 한 척 가격은 2억8000만 달러(약 3100억 원)에 이른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육상에 대규모 가스 공급 기지를 건설할 필요 없이 바다 위에 공급 기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유럽 선주사들의 바람을 들은 현대중공업은 그런 상상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설계도로 만들었다. 세계 1위로 우뚝 선 현대중공업의 역사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을 그대로 만드는 ‘창조와 혁신’의 과정이었다. </SPAN><BR><BR><BR><SPAN style="FONT-SIZE: 9pt"><B>○ 황무지에 세운 기적</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재실 씨(67)는 40년 전 현대중공업이 조선소도 짓지 못한 상태에서 배를 수주해 배와 조선소를 함께 만들던 역사의 현장에서 일했다.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서 설계 업무를 하던 이 씨는 1972년 당시 현대건설 조선기술부(현대중공업의 전신)로 이직했다. 현대중공업은 1973년 3월 20일 첫 수주 선박인 26만 t 규모의 대형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의 건조에 돌입했다. </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당시 울산은 조선소의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황량한 모습이었다. 외국에서는 “현대중공업에서 만든 배는 절대 뜨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이 씨는 첫 배를 건조하던 시기를 회상했다. </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주말도 없이 매일 오후 11시까지 일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사원이나 현장 직원 가릴 것 없이 졸음을 참으며 철판을 잡고 용접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면 못 버티겠지만 가족을 굶기지 않고, 조선소도 없는 회사에서 배를 만든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습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조선소와 배를 함께 만들다 보니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상상력’이 발휘됐다. 당시에는 골리앗 크레인이 없어 육상에서 만든 배를 트레일러에 실어 독으로 날랐다. 선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불도저로 반대쪽을 당겨 속도를 줄여 가며 독의 경사로를 내려가게 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애틀랜틱 배런호가 진수되던 순간을 얘기할 때 이 씨는 20대 후반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모든 직원이 독 주변에 빽빽하게 모여 지켜봤지요. 독이 열리고 물이 들어오자 ‘배가 떴다!’고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죠.”</SPAN><BR><BR><BR><SPAN style="FONT-SIZE: 9pt"><B>○ 아버지의 ‘생존’과 아들의 ‘경쟁’</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강바닥을 준설하는 오니(汚泥) 준설선, 오렌지주스 운반선, 터그보트(예인선). 이 씨는 한 번도 만들어 보지 않았던 배의 설계도를 그릴 때마다 맨손으로 조선소를 이뤄 낸 경험을 생각했다. 맨땅에서 유조선을 짓는 데 성공한 뒤로는 어려운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씨는 “1973년을 관통한 키워드는 ‘생존’이었다”고 말했다. “그땐 다들 ‘이 배가 뜨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는다’는 절박함으로 일했어요. 요즘 후배들은 그런 긴장감이 없는 것 같아요.” </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씨는 2004년 퇴직한 뒤 약 4년간 중국 조선소에서 선주사 감독관으로 일했다. “중국에는 수천 개의 조선소가 있습니다. 중국 조선소가 우리를 따라오려면 멀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중국의 건조 기술이 우리 못지않습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씨의 아들 이수현 대리(35)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대중공업 자재지원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많이 개발하고 좀 더 절박한 심정으로 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대리도 맞장구를 쳤다. “제 또래 직원들을 봐도 회사와 직업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연봉 인상이나 복지에 더 민감한 게 사실입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씨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부심, ‘일단 해보자’며 부닥치는 자세만 있다면 지금 조선업계가 겪는 위기도 이겨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울산=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SPAN><BR><BR>
<DIV class=articlePhotoC><SPAN style="FONT-SIZE: 9pt"><IMG src="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3/19/53799875.1.jpg" width=500 height=343></SPAN><SPAN style="WIDTH: 480px; FONT-SIZE: 9pt" class=t>유기운(오른쪽) 유정열 부자가 15일 경북 포항시 남구 동촌동의 포항제철소 제1 고로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1990∼1994년 회사를 함께 다녔던 이들은 한국에 포스코 같은 회사가 수십 개, 수백 개가 더 태어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포스코 제공</SPAN></DIV><SPAN style="FONT-SIZE: 9pt"><B>▼ 제철소도 역순으로 건설… 파괴적 혁신 ‘용광로신화’ ▼</B></SPAN><BR><BR><BR><SPAN style="FONT-SIZE: 9pt"><B>■ 포항제철의 역사 지켜본 유기운 씨와 아들 정열 씨</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저 건물은 뭐당가? 참 마이 변했네. 여그 들어와 본지가 한 스무 해는 되아부렀겠구먼.”</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유기운 씨(75)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포항 사람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충남의 장항제련소에서 일하다가 1973년 2월 포항제철(현 포스코)로 옮겼다. 월급을 2배 준다는 풍문을 듣고서였다. 이후 1994년 3월까지 그는 포항제철소 제1 제강공장에서 21년간 일했다. 그에게 ‘훈장’과도 같은 경력이다.</SPAN><BR><BR><BR><SPAN style="FONT-SIZE: 9pt"><B>○ 세계 1위 경쟁력의 철강회사</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15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 동촌동의 포항제철소 내로 들어서자 유 씨는 자동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장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퇴임 후 회사 안으로 처음 들어왔는데 그동안 못 보던 건물들이 잔뜩 들어섰다”며 놀라워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제철소 동쪽 끝단에 바다를 새로 매립한 땅에는 ‘포스코의 미래’라 불리는 파이넥스(FINEX) 제3공장이 뼈대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현재 공정은 60∼70% 정도. 올 12월 연간 생산 200만 t 규모의 이 공장이 완공되면 포스코는 전체 철강 생산량의 25%(410만 t)를 ‘파이넥스 공법’으로 만들게 된다. 이 공법은 코크스공정과 소결공정을 생략한 채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유연탄으로 쇳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기존 고로(高爐)공법에 비해 에너지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포스코는 2003년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 공법을 상용화한 데 이어 2007년 파이넥스 제2공장 가동에 들어가면서 일약 세계 최고의 철강기술업체로 발돋움했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철강 전문 분석기관 월드스틸다이내믹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의 명예도 얻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런 설명을 듣고 유 씨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다녔던 회사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가졌지만 ‘세계 최고’는 남의 나라 얘기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가 기억을 더듬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B><BR>○ 40년 전의 파괴적 혁신들</B></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1973년 봄만 하더라도 제철소 인근은 죄다 갈대밭이었다. 유 씨는 덩그러니 만들어진 고로에서 쇳물이 과연 제대로 나올지도 의문스러웠다고 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6월 9일 제1 고로에서 첫 출선(出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일하던 제1 제강공장도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주어진 시간은 6일이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첫 취련(吹鍊) 때도 박태준 사장이 왔지. 6월 15일 아침이었는디, 아래쪽서 누가 버튼을 누릉께 뻘건 쇳덩이가 막 맹글어져 나오당게. ‘첫 취련이다!’ 하면서 다 같이 박수치고 그랬지.”</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이 장면은 한국 경제사에서 변곡점이 됐다. 한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은 자동차, 조선, 건설 등의 비약적인 발전도 원활한 철강 수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포항제철소 공사는 사실 ‘불가능’과의 싸움이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낸 것은 오늘날 ‘파괴적 혁신’으로 불릴 만한 과감한 결정이었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철강 생산과정은 원료→제선→제강→압연으로 이뤄진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마지막 단계인 압연공장(1972년 10월 준공)부터 만드는 ‘백워드 건설 방식’을 택했다. 이곳에서 생긴 이윤을 제강, 제선공장 건설에 투입해 부족한 자금 문제를 해결했다. 박 명예회장은 또 공장 건물의 뼈대조차 올라가지 않은 1971년 7월 제선공장 입간판 사진 한 장을 들고 호주 원료업체를 찾아 장기 공급계약을 이끌어냈다. 이런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없었다면 1973년 종합준공 직후 터진 석유 파동 때 원료난을 겪었을 것이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유 씨의 아들 정열 씨(48)도 포스코 스테인리스압연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5형제 중 장남인 그는 아버지의 큰 자랑이다.</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아버지가 일군 회사가 세계 최고가 됐고, 그곳에서 제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저도 열심히 일해 후대에 영광을 물려줘야죠. 하하하.”</SPAN><BR><BR><SPAN style="FONT-SIZE: 9pt">포항=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SPAN><BR><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