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 1병 보내줘요” 코앞 편의점에도 배달 주문
작성자 : 관리자 / 날짜 : 2020.09.14
코로나19 이후 배달이 일상 된 ‘배달 공화국’
5060까지 앱 사용 자연스러워
작년 음식 서비스 거래 9조 돌파
업체, 배달 안 하면 생존 불가능
#1 프리랜서 애널리스트인 최모 씨(31·여)는 최근 집에 마실 물이 떨어져 배달료 3000원을 지불하고 편의점 배달을 통해 800원짜리 생수 한 병(500mL)을 주문했다. 당장 마실 물이 필요했는데 집 밖으로 나가려면 씻고 치장하는 데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최 씨는 “3800원에 생수 한 병을 사는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편의점까지 가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면 배달료 3000원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2 서울 강남구에 사는 A 씨(67)는 최근 인근 현대백화점에서 판매하는 팥빙수를 먹기 위해 배달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해당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만을 배달해 주는 앱을 발견했다. 백화점에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배달된 팥빙수를 아내와 맛있게 먹은 뒤 그는 이 앱에 매일 3번씩 들어가고 있다. A 씨는 “백화점에 가야만 맛볼 수 있었던 다양한 음식을 집으로 주문해 먹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 됐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배달’이 일상이 되고 있다. 온라인 소비에 익숙했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1980∼2004년생)뿐 아니라 5060세대까지 배달앱에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 된 것. 이젠 배달 없이 어떤 업체도 생존할 수 없는 진정한 ‘배달 공화국’이 됐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배달 공화국의 면면을 살펴봤다.
배달 시장 규모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인 지난해에도 크게 성장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배달 주문 등 음식 서비스 거래액은 9조7365억 원으로 전년 대비 84.6% 늘었다. 이후 올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는 급증하고 있던 시장의 배달 수요를 더욱 폭발시켰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편의점 배달’이다. 업계에 따르면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편의점이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편의점 내부에서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 누가 편의점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겠느냐”는 회의론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반응은 뜨거웠다.
10일 GS25가 코로나19 재확산이 시작된 지난달 17일부터 이달 6일까지 배달 서비스 이용 동향을 분석한 결과 배달 이용 건수는 전월 동기 대비 92.7%나 증가했다. 재택근무 등의 영향으로 평일 이용 건수는 76.9% 뛰었고 주말에도 배달 주문이 폭증해 101.7%의 증가율을 보였다. 배달 서비스 인기 품목으로는 음료, 도시락, 즉석 조리식품(치킨 등)이 꼽혔다. 비식품군에서는 생리대가 상위권에 올랐다. GS25 관계자는 “여성들이 외출이 꺼려지는 날 편의점 배달을 통해 여성용품 주문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외식을 배달로 대체하는 수요도 뚜렷해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2019년 국내 외식 트렌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외식 빈도는 12.9회로 최근 4년 사이 최저치를 찍었다. 반면 배달 주문은 두 자릿수 성장을 계속했다. 월평균 배달 주문 빈도는 최근 3년 동안 외식 부문과 음료 부문에서 각각 13.3%, 100% 증가했다. 올해는 외식과 배달 주문의 빈도 차이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식음료업계도 배달만을 전문으로 하는 매장을 새롭게 만드는 등 배달 수요에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신세계푸드의 배달 전문 매장 ‘셰프투고’가 대표적이다. 셰프투고는 노브랜드 버거를 비롯해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키아누보 등 신세계푸드 자체 외식 브랜드로 메뉴를 구성해 배달하고 있다. 셰프투고의 지난달 배달 건수는 7월 대비 27% 증가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 올해 1월 53%였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인근 직장인들의 점심 배달 비율도 8월 79%까지 늘어났다.
다소 생소했던 ‘섀도 키친(shadow kitchens)’도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배달 판매만을 목적으로 임대료가 비싼 번화가를 피해 골목 구석구석에 공간을 만들어 음식을 조리하는 곳이다. 특히 자영업자들이 섀도 키친 운영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서 수제 햄버거 섀도 키친을 운영하는 유모 씨(42)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서울 강남구에서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다가 비싼 임차료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폐업했다.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이 섀도 키친이다. 여러 배달 플랫폼에 입점하는 데 일부 비용이 들었지만 배달만을 목적으로 음식을 판매하면서 월평균 600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여러 명의 배달 전문 음식 사업자들이 단일 주방 시설을 대여하거나 공유하는 모습도 늘 것으로 보인다. 배달 전문 공유 주방 업체 키친엑스는 이달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실증특례를 부여받았다. 실증특례는 제품과 서비스를 시험하고 검증하는 동안 규제를 면제해 주는 제도다. 빕스 등 외식 프랜차이즈를 운영 중인 CJ푸드빌도 최근 배달만을 목적으로 한 섀도 키친이나 공유 주방 등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 공룡’들도 배달에 사활을 걸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명품 매출에만 기대던 백화점들이 새로운 성장 기회를 배달에서 찾고 있다. 백화점을 직접 찾지 않으면 구매하기 어려웠던 고급 델리, 디저트 제품들과 최상급 농축수산물 등을 주력 상품으로 내세웠다. 특히 백화점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백화점 맛집’ 음식들을 배달하기 시작하면서 차별화를 꾀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전문 식당가나 델리 브랜드 매장에서 바로 조리한 식품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현대식품관 투홈’ 서비스를 선보였다. 현대백화점 점포 인근 3km 내 지역을 대상으로 원하는 식품을 1시간 내로 배달해 주는 것이 핵심이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겁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지난달 12∼26일 현대식품관 투홈을 통한 주문 건수가 서비스 출시 직후 2주(7월 22일∼8월 5일)보다 100% 이상 늘었다. 목표 건수도 50% 이상 초과 달성했다.
갤러리아백화점도 이달부터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명품관의 식품관 고메이494에서 배달 서비스 ‘김집사블랙’을 시작했다. 심부름 앱 ‘김집사’로 잘 알려진 온-오프라인 연계(O2O) 스타트업 업체 달리자와 손잡고 출시한 서비스다. 프리미엄 신선식품 배달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백화점 외부 약국 방문, 세탁물 픽업 등 필요한 심부름이 있으면 세부사항을 추가로 요청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롯데백화점도 이달 중순부터 달리자와 손잡고 강남점 신선식품과 음식 배달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폭풍 성장 중인 시장을 두고 배달 업계도 사활을 건 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쿠팡, 위메프 등 대규모 배송에 특화된 이커머스 업체들이 쿠팡이츠, 위메프오 등 소규모 배달 서비스를 출시하며 시장을 경쟁 체제로 재편하면서다. 우아한형제들과 딜리버리히어로가 각각 서비스하는 배달의민족과 요기요가 여전히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지만 후발 주자의 도전이 거센 상황이다.
실제로 쿠팡이츠, 위메프오 등의 이용자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모바일 앱 분석업체 아이지에이웍스는 10일 지난달 쿠팡이츠의 월간 순이용자 수(MAU)가 74만8322명으로 1년 전 17만 명에 비해 4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쿠팡이츠의 성장세는 시장 2위인 요기요를 위협하고 있다. 올해 7월 25일 기준으로 쿠팡이츠 앱을 내려받은 사람은 2만154명으로 1만9216명을 기록한 요기요를 앞섰다. 지난달 기준 쿠팡이츠의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0.61시간)은 요기요(0.5시간)를 넘어섰다.
위메프오도 지난해 8월 2만3000명 수준이었던 MAU가 올해 8월 17만5414명으로 7배 넘게 증가했다. 위메프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출시한 위메프오의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주문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1071%, 입점 업체 수는 721.8% 증가했다. 코로나 여파에 인지도는 물론이고 주문 건수도 급증한 것이다. 다만 배달의민족(1066만 명), 요기요(531만 명) 등의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97.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편의점 업계도 ‘도보 배달’을 특화시키며 배달앱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GS리테일은 지난달 배달 플랫폼 ‘우리동네딜리버리(우딜)’를 출시했다. 동네를 기반으로 ‘라이더’ 대신 지역 주민인 일반인들이 도보로 배달할 수 있는 거리(1.5km)의 배달 주문만 소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딜은 8일까지 배달원 1만6000여 명을 모집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상태다. 인천에서는 82세의 한 여성이 배달원으로 등록했을 정도다.
배달 서비스가 단기간에 늘어나면서 혼란스러운 모습도 나오고 있다. 오토바이 배달원(라이더)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벌어지는 업체 간 쟁탈전이 대표적이다. 배달 대행업체 바로고에 따르면 7월 26일 대비 지난달 30일 배달 접수 건수는 25.8% 늘어났다. 반면 배달을 수행한 라이더는 7.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오토바이를 활용하는 전업 라이더 수가 제한돼 있는 만큼 인력을 단기간에 수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라이더 수급 문제는 결과적으로 소비자와 음식점주의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음식 배달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지고 있는 것. 배달 업계 관계자는 “최근 음식을 배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이 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라이더들이 ‘귀한 몸’이 되면서 한 명의 라이더가 다수 주문을 소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어지다 보니 소비자와 음식점주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배달 업체들은 라이더에게 지급하는 수수료를 인상하며 1명의 라이더가 1건의 주문만 소화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시작했다. 쿠팡이츠는 이 조건을 내세워 쿠팡이츠가 라이더에게 주는 라이더 수수료를 건당 최대 2만 원까지 올렸고 기존 배달 대행업체도 서울 강남권 등 배달 수요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라이더 수수료를 연쇄적으로 인상하고 나섰다. 하지만 폭증하는 수요에 라이더 수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배달 음식 시장의 성장과 라이더 부족 현상이 지속되면 결국 음식 값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성훈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플랫폼 안에서 자영업자들의 경쟁이 격화되면 판촉 비용이 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소비자 가격 인상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