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7월. 한국화약(현 한화) 인천화약공장에 대형 붉은색 깃발이 걸렸다. 다이너마이트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드는 작업 중임을 알리는 표지다. 정확히는 폭발 우려에 따른 ‘반경 2km 접근 금지’를 의미한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이종현, 이성구, 유영수 씨 등 세 명의 기술자는 고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가 어렵게 찾아낸 한국인 화약 기술자였다. 그들은 약 1년 뒤인 1958년 6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해 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폐허나 다름없었던 한국이 ‘산업 대국’의 길로 나아가는 신호탄이 된 장면이다.
한국화약이 개발한 산업용 화약의 우수한 기술과 품질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철도, 지하철, 아파트 등 선진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도 산업용 화약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화약이 화약을 개발한 배경에는 김 창업주의 사업보국 정신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화약공판이라는 일본 기업에서 관리인으로 근무했던 그는 화약이 산업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광복 후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사업들을 마다하고 “(당시 전량 수입해 쓰던) 화약류 기술의 국산화만이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일념으로 1952년 30세의 나이에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산업용 화약류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한국화약의 성공적인 화약 개발을 발판 삼아 기계와 석유화학, 태양광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한화그룹으로 우뚝 서게 됐다. 김 창업주의 열정과 신념을 보여 주는 말이 있다. “모든 화약인은 정직하다.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반드시 폭발하는 화약처럼….” 이 말은 한국 산업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