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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이요? 생각 없는걸요?” 두 마리 토끼 잡는 네덜란드의 시간제 근무

작성자 : 슈퍼관리자 / 날짜 :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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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이요? 저는 정규직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걸요?”

지난해 11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세계무역센터(WTC). 시간제(주당 32시간) 사무직으로 일하는 안야 데용 씨(47·여)는 기자가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정규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규직에 비해 임금과 처우가 낮은 한국의 시간제 근로자라면 누구나 정규직을 꿈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달랐다. 데용 씨는 “시간제 근무가 육아에 큰 도움이 된다”며 “네덜란드는 시간제 일자리가 보편적이고, 차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시간제로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두 마리 토끼 잡는 시간제 근무  

 

데용 씨는 WTC에서 19년간 일하며 아이를 2명 낳았다. 아이를 갖기 전 3년간 풀타임으로 일했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시간제를 택했다. 직장과 가정, 일과 육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다. 물론 아이들은 늘 엄마가 목마르다. 데용 씨가 “엄마가 집에 좀 더 있으면 좋겠어?”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주저 없이 “네!”라고 답한다. 그래도 그는 현재의 일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일할 때는 아이와 남편에게 죄책감이 들고, 집에서는 일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요. 가정과 직장은 내게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어요. 아이들 친구들의 부모도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있어 아이들도 제 선택을 이해하는 편이에요.”

네덜란드의 시간제 일자리는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정규직보다 임금은 다소 적다. 하지만 다른 처우나 복지혜택은 동일하다. 커리어도 착실히 쌓을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선택에 따라 풀타임과 시간제를 언제든지 넘나들며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네덜란드의 시간제 근로자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37.4%에 이른다. 10명 중 3, 4명이 시간제 근로자일 정도로 매우 보편화된 근로형태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덜란드는 시간제 근로자 비율이 가장 높다.

‘워킹맘’들이 일하는 시간에는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만든 유치원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유치원과 학교는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철저하게 책임진다. 데용 씨는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생활을 정말 좋아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다”며 “은행원인 남편도 정말 바쁘지만, 육아와 집안일은 철저하게 50 대 50으로 나눠서 한다”고 말했다. 

● 육아휴직 대신 근로시간 단축 
 



지난해 11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세계무역센터(WTC)에서 에스테르 디스베르그 씨가 업무를 보고 있다. 아이 2명을 키우는 ‘싱글맘’인 디스베르그 씨는 육아휴직 대신 근로시간 단축을 선택해 한 주에 4일만 일한다. 암스테르담=유성열 기자

WTC의 회계담당자로 아이가 2명인 에스테르 디스베르그 씨(40·여)는 일주일에 나흘(32시간)만 일한다. 매주 4일은 친정 엄마와 보육시설에 아이들을 맡기고, 나머지 3일은 자신이 직접 돌보는 것이다. 하지만 디스베르그 씨는 시간제가 아니라 정규직이다. 네덜란드 노동법상 법정근로시간은 주 40시간(주 5일)이다. 그렇다면 디스베르그 씨는 정규직임에도 어떻게 법정근로시간보다 적게 일할 수 있을까?

해답은 네덜란드의 독특한 육아휴직제에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여성 근로자가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과 ‘근로시간 단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육아휴직을 가지 않는 대신 주 4일 또는 주 3일만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디스베르그 씨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싱글맘’이어서 일을 그만두거나 육아휴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시간제 전환’이다.

이 제도는 디스베르그 씨 같은 싱글맘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육아휴직에 들어가면 국가가 육아휴직급여를 주지만 직장 월급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싱글맘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을 하는 것보다 근로시간 단축을 선택하는 게 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한 셈이다.

디스베르그 씨는 “네덜란드에는 ‘워킹맘’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일을 안 하는 엄마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같은 이유로 전업주부라는 말도 거의 쓰지 않는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 유연한 기업 문화도 필수 
 



지난해 11월 16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컨설팅회사인 ‘액센츄어’ 라운지에서 권슬기 씨(왼쪽)와 임혜성 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현지 기업에 나란히 취업한 두 한국인 청년은 근로시간이 자유로운 네덜란드의 근로문화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암스테르담=유성열 기자

정부가 아무리 제도를 촘촘하게 마련해도 기업의 조직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워라밸을 구현하기 힘들다. 네덜란드 역시 제도의 힘만으로 워라밸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청년들은 “근무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점이 네덜란드 워라밸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다 암스테르담의 컨설팅회사인 ‘액센츄어’에 취업한 임혜성 씨(31·여)는 “하루 8시간 근무가 정해져 있지만, 각자 사정에 맞춰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다”며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업무 중에도 개인 용무를 볼 수 있다. 그 대신 그만큼 더 일하면 그뿐”이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컨설팅회사인 ‘언스트영’에 다니는 권슬기 씨(35·여)는 “한국에서는 내 일이 곧 내 삶이었다.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었다”며 “여기서는 일과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일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또 다른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SER 사무총장 “우리의 워라밸, 작은 변화들이 쌓인 결과” ▼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SER)의 베로니크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왼쪽). 헤이그=유성열 기자
“우리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하루아침에 이룬 건 아니다. 오랜 시간 작은 변화들이 쌓여 새로운 문화를 뿌리 내린 결과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화기구인 사회경제위원회(SER)의 베로니크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사진 왼쪽)은 지난해 11월 13일 헤이그의 SER 본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도 워라밸을 이루려면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보편화시켜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네덜란드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으로 불리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이 협약에서 노동계는 임금 동결을, 경영계는 고용 보장을 약속했다. 정부는 사회안전망 구축에 합의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와 각종 유연근무제를 과감히 도입해 2017년 고용률을 75.8%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워라밸을 정착시켰다. 1950년 설립한 SER은 이런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이끈 기관이다.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은 “기업은 유연성을 확보하고, 근로자는 재량껏 스케줄을 짤 수 있어 양측 모두 시간제 일자리를 선호한다”며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늘려야 여성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근로자가 더 일하고 싶으면 더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법정근로시간(주 40시간)에 얽매여 각종 규제를 가하기보다 사용자와 근로자에게 자율성을 더 많이 줘야 워라밸을 촉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네덜란드도 시간제 일자리가 모든 걸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었다. 그는 “국가뿐 아니라 고용주도 전문적인 보육시스템을 잘 갖춰야 여성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며 “국가 전반의 복지제도가 시간제 일자리와 융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두고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은 “우리 노동계도 한국의 노동계처럼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질 모두를 요구할 때가 있었다”며 “노사정(勞使政)이 계속 대화하다보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노동력을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투자로 생각하는 기업이 늘어나야 합의점이 생긴다”고 말했다.

티메르하위스 사무총장은 이를 위해 사회적 대화기구의 ‘독립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SER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어도 동일한 의견을 계속 제시할 수 있다”며 “노동과 일자리정책은 정권과 무관하게 연속적이어야 한다. 한국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독립성을 확보해야 ‘좋은 타협’을 이뤄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암스테르담·헤이그=유성열 기자 r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