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을 잊은 사람들,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작성자 : 슈퍼관리자 / 날짜 : 2017.12.26
성탄절에도 두꺼운 수험서·일터 향하는 사람들
“캐럴이 그리워”…서울역·쪽방촌 사람들의 성탄절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반짝이는 조명으로 장식된 트리 아래 모여 가족이나 지인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모습은 ‘성탄절’이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다.
비와 함께 찾아온 올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일찌감치 일어나 우산을 쓰고 저마다의 삶으로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보통의 날과 다름없이 일터로 향하는 직장인, 골목길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쪽방촌 노인, 시험을 앞두고 독서실로 향하는 고시생과 취준생. 크리스마스 캐럴이 닿지 않는 곳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12월24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어딨어요”…연휴 잊은 고시생·직장인
“글쎄요, 오히려 한산해서 더 좋은데요.”
‘고시촌’으로 알려진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모씨(25)는 오후 공직적격성평가(PSAT)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수험서를 챙겼다.
내년 초 예정된 공무원 시험을 대비해 주말에도 학원과 독서실을 오간다는 이씨는 도서관 열람실처럼 정적이 흐르는 카페에서 빠르게 수험서 기출문제를 풀고 있었다.
10여명의 고시생 틈 속에서 수험서를 들여다보던 그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지 카페가 한산해서 좋다”며 “성탄절 당일인 25일에도 학원 수업을 들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은 고시촌의 거리는 연휴를 맞아 휴점한 고시식당과 카페로 적막함이 흘렀지만 고시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꺼운 수험서를 들고 갈 길을 찾고 있었다.
한 무리의 고시생들은 거리에 둘러 모여 “그 문제는 어떻게 풀었어?” “난 잘 모르겠던데” 등 시험 이야기에 열중하기도 했다.
고시촌의 한 공무원학원 관계자는 “보통 신림동 학원들은 주말에도 평일과 같이 수업을 진행한다”며 “당장 모레부터는 국립외교원 시험 관련 수업이 개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쁘다”고 답했다. 이어 “학생도 학원도 주말없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만큼 크리스마스가 별일이겠냐”고 되물었다.
한 카페에 앉아 머리를 질끈 묶고 국립외교원 시험 준비를 하던 유모씨(23·여)는 “크리스마스라고 놀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씨는 오히려 “크리스마스라고 놀면 공부에 지장이 생긴다”며 “특별히 성탄절 느낌이 나지도 않고 그저 평일같이 느껴진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초시계를 켠 뒤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서울시내 유명 호텔에서 일하는 황모씨(26)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장 바쁜 대목이다. 연휴를 맞아 몰려든 호텔 투숙객을 상대하던 황씨는 “남들 놀 때 일하는게 썩 기분은 좋지 않다”면서도 “직업 특성상 별수 있겠느냐”며 웃어 보였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연휴가 찾아오면 호텔 방이 꽉 차는 탓에 더 바쁘다는 황씨는 “투숙했던 손님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줄 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며 “손님들이 나로 인해 특별한 추억을 갖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피곤함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취업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류모씨(24·여)에게도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특별한 날이 아니다.
휴일을 맞아 만화카페를 찾는 손님을 맞이하랴, 틈틈이 취업공부를 하랴 쉴 틈이 없다는 류씨는 “할 일이 너무 많아 크리스마스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며 “심지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26일에 면접이 있다”고 말한 류씨는 “오늘만큼은 일찍 일을 마치고 면접준비를 하고 싶지만 유난히 손님이 많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캐럴이 끊긴 곳…서울역 노숙인·쪽방촌 사람들
서울역에 상주하는 노숙인들과 성북구 돈암동 쪽방촌에도 성탄절을 알리는 캐럴은 들려오지 않았다.
1호선 서울역 3번 출구 앞에서 상자 하나를 방석 삼아 깔고 앉은 노숙인 연모씨(59)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휴가를 나온 군 장병과 시민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과거 중화요릿집에서 일하다가 노숙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한 연씨는 “가끔가다 누가 밥을 주면 먹고 안 주면 그냥 굶는다”며 “오늘 점심에는 인근 교회를 찾아가 식사를 할 생각”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서울역 바닥을 훑으며 담배꽁초를 줍던 송모씨(56)는 “가족이 있지만 돈도 없고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집에 가고 싶지만 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고백했다.
번화가인 종로3가역 뒤편에 형성된 돈의동 쪽방촌도 외부세계와 단절된 듯 고요함이 감돌았다. 양 손을 펼치면 꽉 차버리는 ‘쪽방’이 건물마다 옹기종기 들어찬 쪽방촌의 좁은 골목길에는 마시다 남은 술병이 비에 젖어들고 있었다.
방에 앉아 겨울비를 바라보던 김옥순씨(88·여)는 지난 1945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용됐던 피해자였다. 전쟁으로 남편까지 여읜 그를 세월은 쪽방촌으로 이끌었다.
벌써 12번째 쪽방을 바꿨다는 김 할머니는 “세 아들 중 두 명과는 이미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며 “혼자 생활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 괜찮지만 내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모를까봐 그게 걱정이다”라고 읊조렸다.
하지만 쪽방촌 노인들에게도 성탄절은 그리운 추억이었다. “5~6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지 않아 서운하다”고 밝힌 김모 할머니(80)는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고 살았는데 이제 캐럴이 들리지 않는다”면서 “캐럴을 들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았는데…”라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쪽방촌에도 캐럴이 울렸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세상이 각박해진 건지 크리스마스가 와도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며 쓸쓸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을 뿐이었다.
(서울=뉴스1)